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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가족 추천 코스

[대전 유성구, 충남 공주시, 세종 금남면][가족 추천 코스] 생태환경과 과학으로 꿈꾸는 멋진 도시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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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환경과 과학으로 꿈꾸는 멋진 도시

첨단과학기술의 메카인 대전, 푸른 호수와 초록의 숲, 정겨운 마음들을 둘러보는 것은 대전 여행의 또 다른 보너스이다. 좋은 추억을 만들며 내용까지 알찬 여행을 하고 싶다면 시티투어를 이용해 보자. 진짜 대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72.27km
- 코스 총 소요시간 : 1일


 




대전역사박물관

- 홈페이지 : https://www.daejeon.go.kr/his/index.do
대전시립박물관은 대전 도안신도시 개발에 따라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2012년 10월 16일 개관하였으며 상설전시실, 기증유물실, 기획전시실, 도시홍보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대전 유학자의 삶과 문화를 주제로 귀중한 대전의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고, 기증유물실에는 대전시민이 기증해주신 유물들을 전시되어 있다. 또한, 기획전시실에서는 매년 1~2회 특별전을 개최하여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대전시민들이 배우고 놀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강좌, 공연 등을 다수 개최하고 있다.
* 개관일 : 2012년 10월 16일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

- 홈페이지 : 공주시 문화관광 http://tour.gongju.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에 연접한 옛 지명은 공주읍 송산리 宋山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웅진시대(475~538)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원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 이들 무덤은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벽돌무덤[塼築墳]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 돌로 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웅진시대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다.

* 송산리 제1~4호분(宋山里 第1~4號墳)

4기의 백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이미 도굴된 상태에서 공주지역의 백제유적 가운데 1927년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당시에는 5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 4기만이 복원되어 있다.무덤에서는 금과 은, 금동으로 만든 껴묻거리가 일부 출토되어 웅진시대(475~538) 백제문화 복원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 무령왕릉(武寧王陵)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501~523)과 왕비의 합장 무덤이다. 1971년 5호분과 6호분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무덤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塼築墳]으로, 널방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으며 남북길이 4.2m, 동서너비 2.72m, 높이 2.93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燈龕)과 창문시설을 설치하였다. 특히 입구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공과 무덤을 만든 연대를 말해주고 있다. 송산리분군에 있는 무덤 중에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왕과 왕비의 금제 관장식을 비롯하여 총 108종 4,600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다.

* 송산리 6호분(宋山里 6號墳)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塼築墳]으로 널방의 크기는 남북 길이 3.7m, 동서 너비 2.24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는 등감(燈龕)을 설치하였으며,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四神図)를 그렸다. 목관을 올려 놓았던 관받침대가 하나인 것으로 보아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통해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송산리 5호분(宋山里 5號墳)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조사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널방은 남북 길이 3.45m, 동서 너비 3.26m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닥에서 1.3m 높이까지는 벽면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쪽부터는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은 후, 정상부에 판석 1매를 얹어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바닥에는 목관을 올려놓는 관받침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굴로 인하여 토기 1점과 약간의 장신구, 그리고 관못만이 남아 있었다.

* 송산리 방단계단형 적석유구(宋山里 方壇階段形 積石遺構)

송산 정상부 가까이에 있는 적석유구이다. 제 1단은 폭이 15m, 제 2단은 11.4m, 제 3단은 6.9m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계단모양을 하고 있다.목관을 놓은 흔적은 없으며, 대신 그 자리에 10cm 두께로 붉은 색의 점토를 깔았다. 내부에서는 삼족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와 옹관편이 수습되었다.내부에서 목관과 같은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성시대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가묘(假墓)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무덤이 아닌 제사시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공주 공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주 공산성 [유네스코 세계유산]

- 홈페이지 : http://www.gongju.go.kr/prog/tursmCn/tour/sub02_01_04/view.do?cntno=14
* 백제 문주왕 시절의 산성, 공산성 *
공주 시내 산성동에 있는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1년(475)에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사적 제12호인 공산성은 총 연장 2,660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요지이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백제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 안에는 웅진 도읍기로 추정되는 왕궁지를 비롯해 백제시대 연못 2개소, 고려시대 때 창건한 영은사,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과 사적비, 남문인 진남루, 북문인 공북루 등이 남아 있다. 동문과 서문은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주변에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공산성은 역사와 문화가 함께 정이 깃든 수려한 자연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있게 보여지고 있다. 가족 단위, 부부, 연인들이 금강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산책할 성벽길이 있고 우거진 숲과 숲사이의 산책로가 있다. 계룡산과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오고 비단결 같은 금강이 발 아래에서 찰랑거린다.

* 공산성의 유래 *
공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 공산성 서쪽에 위치한 정각, 공산성 쌍수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1984.05.17 지정) *
쌍수정은 공산성 진남루 부근의 서쪽 고지대에 위치한 정각이다. 원래 그 터는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산성 파천시 머물렀던 장소이며, 이 곳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인조는 환도시 쌍수에 정3품 대부작을 하사하였는데 그 후 나무는 죽고 구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유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관찰사 이수항이 영조 10년에 쌍수정을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정조 11년, 고종 7년, 1947년에 걸쳐 중수되어 오다가 1970년에 건물은 전면 해체되고 새로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복원된 쌍수정의 건물은 본래의 형상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한다. 자료에 의하면 건물은 이층의 누각이며 누각 주변에 담장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의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익공 계통의 건물로 조선 후기 전형적 누각의 형상을 모방하고 있지만, 원형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공산성의 남문, 공산성 진남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1984.05.17 지정) *
공산성의 출입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이 진남루는 성의 남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로 대칭시켜 조성한 후 두 석축 기단에 걸쳐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내고 있다. 원래 토성이었던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석축성으로 개축된 것은 조선 초기의 일로 이 진남루 역시 그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후 여러 차례 수축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 전부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 공산성 추정왕궁지 *
공산성 내 서쪽의 표고 85m의 정상부, 종래 쌍수정 광장으로 불려 왔던 약 6,800㎡의 면적이 추정 왕궁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임류각은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980년에 조사된 임류각지에서 서쪽으로 왕궁이 입지할 수 있는 위치는 이 곳 밖에 없다는 논거로 1985년부터 1986년에 걸쳐 조사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유적은 건물지를 비롯하여 용수를 저장할 수 있는 연못과 목곽고 및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이들 유구나 또는 출토된 유물들이 백제시대로 편년되어 왕궁지의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확인된 건물지로는 반지하식 건물지, 굴건식 주공을 사용한 건물지,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지 2개소와 연지, 저장혈, 목곽고 등이 있다. 건물지는 굴건식 건물지까지는 백제가 웅진으로 남천하기 이전의 유적으로 보고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지는 남천 후, 즉 왕궁지의 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적심석 검물지는 각각 24칸, 10칸 규모였다. 수습된 유물은 대체로 기와류인데 막새기와는 백제의 8엽, 10엽 연화문을 비롯하여 파상문 수막새 기와이고, 10엽 연화문 수막새 기와는 연꽃의 끝부분 반전이 심하게 이루어진 백제 초기의 것으로 공주 공산성에서 주로 출토되는 전형적 형식이다.이외의 평기와 중에는 웅천(熊川) 혹은 관(官)자의 명문이 찍힌 것을 비롯한 각종의 도장문이 나왔다. 토기는 백제토기로 등잔을 비롯하여 개물이나 삼족토기 등이며 특수 유물로 봉황형 금동향로가 수습되었는데 이는 부식이 심하고 출토 위치가 불분명하지만 조사된 건물지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 공산성의 북문, 공산성 공북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1976.01.08 지정) *
공북루는 공산성에 설치된 문루 중 북문으로 성문을 나서면 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게 되어 있다. 선조 36년인 1603년에 옛 망북루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시축 후 수 차례에 걸쳐 개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나 현존의 것은 본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문루 건축의 대표적 예로 꼽는다. 건축의 내용은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동성의 충청도 편에 보면 1603년인 계묘년에 쌍수 산성의 수리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공북, 진남 양문을 건립한 내용을 적고 있어 현존의 공북루 건물의 축조에 대한 기사를 남기고 있다. 본래 현존 공북루의 자리는 망북루가 자리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유지는 공북루의 동쪽 성벽상에 초석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 외형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망북루의 초석은 자연석으로 4매가 지표면에 남아 있지만 이것만으로 건물의 형상을 복원하기는 어렵다. 성문의 건축은 협축형태로 조성된 석성이 절단된 후면에 이층의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면적은 남문인 진남루의 2배 가량이며, 고주를 사용한 이층의 다락집 형태로 고창 읍성의 공북루와 유사한 모습이다. 각 문의 크기는 등간격이며 누의 중앙 어칸에는 출입문을 달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근세까지 문비가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백제시절의 누각터, 공산성 임류각지 *
임류각지는 공산성의 산정에 위치한 광복루에서 서쪽으로 약 150m 정도 떨어진 산의 중턱 서향 사면에 위치한다. 임류각은 삼국시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후, 약 25년이 지난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 (493)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이 남아있는 건물이다. 1980년의 조사에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된 유지는 정비되어 있으며, 건물의 문화적, 학술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본래의 유지에서 약간 위쪽에 새로이 복원되어 있다.임류각에 대한 조사 결과 초석의 배열은 남쪽열에 6매, 동쪽열에 7매를 배치하여 건물은 남변이 5칸, 동변이 6칸이지만 각각 10.4m ×10.4m의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에 사용된 초석은 총 42매였으나, 현재 남아있는 초석은 31매이고 나머지 11매는 결실되어 있다. 초석의 기본형태는 방형이나 2∼3매의 돌을 합하여 1개의 초석을 이루고 있으며, 고층건물을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초석의 상면에 요철을 주어 기둥이 힘을 받고 밀착되도록 하는 소위 그랭이기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기반이 약한 초석 주위에는 굴건식 원형 주공을 만들어 보조 기둥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임류각지의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가 대부분으로, 단판 8엽의 백제 연화문 와당과 후대의 세판 연화문 와당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임류각지는 초석을 지상에 노출시키면서 정비가 이루어져 있다. 더불어 임류각에 대한 복원도 이루어져 정면 6칸, 측면 7칸의 이층 형태의 누각 건물이 광복루 아래 광장에 복원되어 있다.

* 공산성의 동문의 터가 있는 곳, 공산성 동문루 *
공산성 중심부에서 남동방향으로 토성이 위치하였는데 본래 여기에는 공산성의 동문이 있었으나 훼손되어 단지 유지만 남아 전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폭 5m 정도의 토성이 절단된 형태로 남아 있었는데, 1980년에 문지가 조사되어 구체적 형태가 확인되었다. 당시 조사된 문지의 내용을 보면 규모는 문지의 통로길이가 6.54m이고 너비가 2.46m로 남아 있었다. 문지의 양쪽에 문지석 2매가 원위치에 남아 있었고 자연석으로 쌓은 통로벽도 원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2매의 문지석의 상면에는 문설주공이 장방형으로 길이 15㎝, 너비 5㎝, 깊이 5㎝로 파여 있었고, 그 문설주공의 바로 안쪽에는 원형으로된 분지공이 있었는데 지름이 11㎝에 깊이는 7㎝였다. 이러한 크기와 모양은 양쪽의 문지공에서 동일한 것이 었다. 다만 서쪽 문지공의 바닥에는 문초곶이의 마멸방지를 위하여 설치된 무쇠받침도 남아 있었다. 문지석의 전면에는 장대석을 높이대로 놓고 그 위에 큰 면석 하나를 포개어 놓았다. 이렇게 큰 면석을 서쪽에 똑같이 쌓은것은 밖에서 문을 열지 못하게 한 성문의 공통적 형식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지석 양끝에 접해서 통로벽을 쌓았다. 현재 이 공산성의 동문은 정비와 함께 문루가 복원되어 있다. 문루는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 형식에 따른 것이며 규모는 기록에 남아있는 삼칸규모라는 내용에 맞추어 건립한 것이다.

* 공산성 내 연못,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공주공산성연지 - 충청남도 기념물 제42호/1982.12.31 지정) *
연지는 공산성 북쪽의 금강과 영은사(靈隱寺)사이에 있는 연못이다. 공산성에는 우물이 3개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곳과 쌍수정(雙樹亭)남쪽의 것 2개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으나 1982년부터 1983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확인. 정비한 것이다.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연못의 축석상태를 보면, 모두 단을 두어 쌓았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아울러, 축석에 사용된 석재는 비록 정치석되지는 않았지만, 면을 어느 정도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다. 이들의 축조는 매우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석질은 절석이 잘도는 반암계통을 사용하고 있다.

* 공산성 연못 *
연못은 광장의 전면 남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지면을 깊게 파고 그 안에 자연석을 원형으로 쌓아 만든 것이다. 규모는 상면의 너비가 7.3m이고 바닥의 너비가 3.0m에 깊이는 4.18m이다. 전체적인 형상은 대접형으로 정연한 축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원상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축조를 보면 부식된 화강암질인 생토면을 지름 9.5m되게 원형으로 파고 내부에 석축을 한 것이다. 더불어 바닥은 널찍한 판석을 깔았는데 호안석면은 부정형 할석을 연못 안쪽으로 면을 맞추어 1열만 축조한 것이다. 특히 벽면은 위로 쌓아 올리면서 약간 밖으로 휘어 올려 지름이 위로 올라갈수록 넓게 배려한 것이다. 한편 호안석의 후면은 점성이 강한 점토를 1m의 너비정도 채우고 있는데 연못 외변이 동일한 상태이다. 이는 연못 내의 물이 누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이 연못은 추정왕궁지역의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후쳐 있으면서 중심건물로 추정되는 24간 건물의 정면 중앙에 자리한다. 따라서 외형상으로는 조경을 위한 시설인 것으로 추정되나 또다른 기능, 즉 용수 저장을 위한 시설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이는 연못 내의 용수는 외부에서 길어다 채운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편 연못 안에서 흙이 완전하게 채워져 있으면서 기와나 토기 등의 각종 유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 바 유물들은 전부 백제시대의 것이다. 기와는 평와를 비롯하여 숫막새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숫맛새 기와는 단판 10엽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8엽연화문, 그리고 파상문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연화문 와당은 소판이지만 연판의 반전이 심하고 연판 자체는 풍만하면서도 안정감이 있는것이다. 파상문 숫막새 기와는 양선으로 만든 것과 막새면에 볼륨을 둔것으로 구분되는데 소박하지만 균형과 유려한 멋을 갖추고 있는 것들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병형토기를 비롯하여 삼족토기, 개물, 등잔 및 벼루 등이 있는데 이들은 백제토기로 정형을 이루는 것들이다. 병형토기는 표면에 자연 유가 있는 평저의 기형인데 광견형으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벼루는 소형의 원판형에 다리가 3개 부착된 것이다.

* 공산성 동쪽의 누각, 공산성 광복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1984.05.17 지정) *
광복루는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는 누각이다. 이 곳은 공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토성이 겹성으로 위치한 곳인데 공산성 두 개의 봉우리 중 서쪽의 봉우리에는 쌍수정이 있고 동쪽의 봉우리에는 광복루가 있으며 공산성의 가장 고지대에 위치하여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현재 광복루로 불리는 건물은 원래 해상루라 하여 성 내의 중군영 中軍營의 문루였으나, 중군영이 폐쇄되면서 중군영지에 있던 것을 일제 초기에 옮겨 웅심각 雄心閣이라 불렀으며, 1945년에 퇴락한 누각을 공주의 주민이 합심하여 다시 보수하였고, 이듬해 4월에 김구, 이시영이 이 곳에 이르러 누각에 국권회복의 뜻을 기념하는 광복이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누각 명칭이 개칭되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각지붕 초익공 양식으로 창방을 각 칸마다 우미량과 함께 깎아내어 장식적 효과를 내고 있음이 특이하다. 8각의 고준한 화강암 주초 위에 고주를 올렸으며 지붕은 홑처마로써 네 귀퉁이를 반전시킴으로써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 공산성의 서문,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서문지) *
서문은 본래 유지만 남아 있었으나, 최근 문루와 함께 새로운 형태로 문루의 복원이 이루어져 있다. 복원된 문루는 공산성 서쪽 성곽선에 연결되게 성선을 연결하면서 성의 입구를 개구식으로 내면서 그 위에 문루를 올린 상태이다. 더불어 본래의 문지는 성내의 출입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문루는 외형만 겸비하고 출입시설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본래 공산성 서문 문지의 복원은 이미 1975년에 성곽에 대한 보수공사를 겸하여 실시한바 있다. 그러나 1975년의 보수에서는 양단의 기단만 축석하였을 뿐 누적은 복원되지 않은 채 남겨 놓았었다. 당시 복원된 기단부는 높이 4.4m, 너비 5-6m, 그리고 길이는 각각 17m로 조성하였는데 좌우 양단간의 간격은 7m의 범위였다. 본래 서문지의 형태는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 문의 형태에 대하여 여지도지에서는 동,서문은 각각 3칸이란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서문지의 복원은 1990년에 이르러 본래의 문지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3칸 규모의 고주 형태의 문루가 축조되었다. 비록 최근에 새로이 조성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북루

광복루

임류각





충청남도 산림박물관

충청남도 산림박물관

- 홈페이지 : 충남산림환경연구소 http://www.keumkang.go.kr
* 자연과의 만남이 있는 곳, 산림박물관 *

창벽에 가로막혀 나룻배를 타고 드나들어야 했던 오지마을인 이 곳에 1994년 충청남도 산림환경연구소가 이전하면서 주변의 잘 보존된 울창한 숲을 금강자연휴양림으로 지정하였고 1997년 10월 산림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곳의 볼거리로는 산림박물관, 수목원, 온실, 야생동물원, 야생화원, 연못, 팔각정 등이 있으며, 중부권 최대의 전천후 자연학습 교육장으로 손색이 없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산림박물관의 웅장한 건물은 백제의 전통양식으로 건립되었으며. "자연과의 만남, 산림의 역사, 산림의 혜택과 이용, 고통받는 산림, 산림정책과 미래의 산림"을 주제로 산림에 관한 모든 것을 전시한 산림문화공간이며 금산의 은행나무, 공주의 당산나무, 안면도 소나무 등을 실제 크기와 모양으로 재현해 놓았다. 유리 돔으로 지어진 대형온실에는 열대, 아열대 식물을 전시, 재배하며 야생 동물원에는 반달곰, 멧돼지 등 10종의 수류와 원앙,공작새 등 31종의 조류를 사육하고 있고 29ha의 수목원은 일반인을 위한 산림학습교육장이다. 철쭉원, 매화원 등의 전문수목원과 창포, 톱풀, 구절초 등 야생화를 관찰할 수 있는 야생화원, 분수, 폭포, 무지개다리 등을 시설한 전통 연못이 있다.

* 산림박물관의 현황 및 의의 *

대지 면적은 53,310,000㎡이고 총 28동의 건물 면적은 11,305㎡이다. 현재 관리과(서무, 시설관리), 임업시험과(산림자원연구, 환경임업, 임업생산연구, 밤연구), 산림박물관(관리, 자연학습)으로 편제되어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금강자연휴양림, 금강수목원, 산림박물관, 열대온실 등의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충청남도의 명산인 계룡산 줄기의 국사봉 자락인 나룻배를 타고 드나들어야 했던 오지에 잘 보존된 산림에 휴양림 및 부속 시설을 마련함으로써 중부권 최대의 산림 휴양 문화 공간 및 자연 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유성온천지구

유성온천지구

- 홈페이지 : http://www.yuseong.go.kr
* 온천과 즐거움이 있는 곳, 유성온천지구 *

유성온천은 대전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약 11km 가량 떨어진 유성구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대단위 온천관광타운이다. 유성의 온천수는50∼400m로 구성된 화강암 단층 파쇄대에서 생성된 물로서, 화강암의 단층균열층을 따라 지하 200m 이하에서 분출되는 27~56℃ 정도의 고온 열천이다.약 60 여종의 각종 성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중금속이 전혀 검출되지 않은 산성도(pH)7.5∼8.5의 약알카리성 단순천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특히 온천이 시내에 위치해 있어 대표적인 도시형 온천으로 주변으로 대규모 숙박시설과 유흥주점들이 들어서 관광타운을 형성하고 있다.또 유성컨트리클럽, 꿈돌이동산, 엑스포과학공원 등이 조화를 이뤄 관광과 온천욕을 겸한 단체관광객과 일반 행락객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도시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유성IC와 대전 월드컵경기장이 불과 1km 남짓한 거리다. 전국 어디서나 접근이 쉽고 이용이 편한 온천타운으로 발전의 소지가 더욱 높다.

* 유성온천지구의 또다른 볼거리, 5월의 눈꽃축제 *

대전은 5월이 되면 바빠진다. 이곳 유성온천거리에 5월의 눈꽃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유성온천거리에는 눈을 닮은 하얀 꽃잎이 아름다운 이팝나무가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고, 눈꽃거리가 조성되어 매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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