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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나홀로 추천 코스

[경북 경주시][나홀로 추천 코스] 바다의 용으로 다시 태어난 문무대왕을 찾아서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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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용으로 다시 태어난 문무대왕을 찾아서

경주 시내에서 토함산을 넘어가면 기림사, 골굴사 등 사찰과 함께 삼국통일의 주역인 문무왕의 자취를 만나러 가는 길이 이어진다. 선무도로 유명한 골굴사에서 암벽에 새겨진 마애여래불을 만난 뒤 사세에 비해 차분하고 고즈넉한 기림사를 돌아본다. 수중릉으로 조성된 문무왕릉과 신문왕이 조성한 감은사지를 둘러보고 경주의 바다를 만끽해보자.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31km
- 코스 총 소요시간 : 7시간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 홈페이지 : http:///www.golgulsa.com/
http://www.gyeongju.go.kr/tour
http://www.cha.go.kr
기림사 골짜기에 위치한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불이다.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 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축서사 비로자나불좌상 (보물 제995호)과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림사

기림사

- 홈페이지 : 기림사 http://www.kirimsa.net
☞ 템플스테이 보러가기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에 있는 신라 시대의 절로서 16동의 건물로 불국사 다음 가는 규모다. 이 절은 신라 초기에 천축국의 사문 광유성인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처음에는 임정사라 불리다가 원효가 도량을 확장하면서 기림사로 개칭했는데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길이 없다. 기림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고색 창연한 대적광전을 비롯, 수령 500년 이상 된 큰 보리수 나무와 목탑터가 있는 지역과 성보 박물관. 삼성각, 명부전, 관음전 등이 있는 지역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은후 6차례나 다시 지어졌다는 대적광전은 배흘림 기둥의 다포식 단층맞배지붕의 건물로 단아하고 웅장하다.
기림사는 또 다섯 가지 맛을 내는 물로 유명하다. 오종수라고 불리는데 차를 끓여 마시면 맛이 으뜸이라는 감로수와 그냥 마셔도 마음이 편안하다는 화정수, 기골이 장대해진다는 장군수,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 물빛이 너무 좋아 까마귀가 쪼았다는 오탁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장군이 태어날까 두려워 물길을 막아버렸다는 장군수를 제외하곤 다른 네 곳은 지금도 각기 다른 물맛을 내며 물이 솟아나오고 있다. 기림사로 가는 도중에 12개의 석굴로 이뤄진 골굴사가 있다. 원래는 기림사 산내 암자였으나 독립 사찰이 된 후 선무도의 본산이 돼 전국에 선무도를 보급하고 있다.
* 주요문화재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보물 제415호),경주 기림사 대적광전(보물제833호),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958호),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보물 제959호)





감은사지

감은사지

- 홈페이지 : http://www.gyeongju.go.kr/tour
감은사(感恩寺)는 신라 제30대 문무대왕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하고 난 후,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다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아들인 신문왕이 그 뜻을 좇아 즉위한 지 2년 되던 해인 682년에 완성한 신라시대의 사찰이었다. 문무대왕은 죽기 전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하여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바로 대왕암이며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여 사찰을 완성하고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79년부터 2년에 걸쳐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얻어진 자료를 통해 창건 당시의 건물 기초대로 노출 정비한 것이며, 아울러 금당의 지하에는 바다용이 된 문무대왕의 휴식을 위한 상징적인 공간을 마련한 특수 구조와 동쪽으로 통로를 만들었다고 하는 흔적도 밝혀 놓은 것이다. 우뚝 솟은 두 삼층석탑은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으로서 수십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어 조립식으로 세운 것으로 전체 높이 13.4m에 이르는 신라 삼층석탑 중 최대의 것이다.





문무대왕릉

문무대왕릉

- 홈페이지 : http://www.gyeongju.go.kr/tour
봉길리 앞바다에 육지로부터 200m쯤 떨어진 바위섬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 30대 문무왕 (661-681)의 수중릉이다. 둘레 200m의 바위섬에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 모양의 물길을 깎은 다음, 가운데 작은 못처럼 파여서 항을 이루고 있으며, 이곳에 깊이 3.6m, 폭 2.85m, 두께 0.9m의 큰돌을 물속 2m 깊이에 놓아 그 밑에 유골을 모신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단, 화장을 해서 재를 뿌렸느냐 유골을 직접 모셔 놓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간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이 큰 돌을 대왕암이라 하며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견대

이견대

- 홈페이지 : http://www.cha.go.kr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 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동해구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우현 고유섭선생의 반일 의지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제자들이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명백한 침략을 내선합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우격다짐에 쐐기를 박듯,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경계한 문무왕의 호국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며 고유섭이 지은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 뜻이 더 깊다.





송대말등대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 앞바다를 밝혀주는 송대말 등대는 1955년 무인등대로 건립되어 1964 년 유인등대로 승격시켜 운영하고 있다. 2001년도에 경주시 감포읍의 상징인 감은사지 석탑모형을 본따 새롭게 만든 등탑은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하얀 등탑과 푸른 소나무숲이 잘 어우러지는 이곳 , 등탑 전망대에서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경주의 동쪽 바다를 이용하여 일본과 교역을 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선박이 안전하게 접안하여 해상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은 당시의 해역 여건으로 볼 때 감포 ( 甘浦 ) 일 것이다 .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감포는 경주에서 33Km 떨어져 있으며 , 송대말은 ( 松臺末 ) 감포항의 북쪽의 위치하는 곶으로 육지 끝에서 약 1000m 까지 암초들이 길게 뻗어 있어 작은 선박들의 사고가 빈번하였다. 또한 먼바다에서 조업후 감포로 입항하는 선박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지형이 송대말이다. 수령 300 년∼ 400 년 정도 소나무가 무성하여 지역에서 유일한 공원이며, 일제시대부터 축양시설을 하여 바다에서 고기를 길렀으며, 1919 년 어항으로 개항되었다.
항의 위치와 부근에 산재하는 험초 및 장해물을 표시하기 위하여 1933년 2 월 감포어업 조합에서 등간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동해안 운항선박이 늘어나면서 항의 북쪽에 육지 끝 송대말에 1955년 6월 30일 무인등대를 설치하였으며, 육지초인표지 역할의 필요성이 있어 기존의 등탑에 대형 등명기를 설치하여 광력을 증강하고 무신호기를 설치하여 유인등대화 하였다.
* 최초점등일 - 1955년 6월 30일
* 구조 - 백4각콘크리트(21m)
* 등질 - 백섬광 20초에 1섬광
* 특징 - 백색과 홍색의 호광등으로 인근해역의 천소구역을 알리기 위하여 설치된 등대로 신라시대 건축양식(2001년 12월 24일)을 도입하여 지역을 상징하는 등대시설로 개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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