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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도보 추천 코스

[서울 중구][도보 추천 코스] 남산 자락 딸각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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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자락 딸각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옛 남산은 한양을 지키는 요새이자 서민의 생활 터전이었다. 딸각발이라 불리는 서생도 살았고, 도둑이 은신하는 곳이기도 했단다. 그만큼 이 지역에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숨어 있다. 지금은 각종 경기와 행사가 펼쳐지는 장충체육관과 공원들이 들어서 있다. 남산한옥마을까지 쉬엄쉬엄 걸어가 보자.


출처:이야기를 따라 한양 도성을 걷다.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4.65km
- 코스 총 소요시간 : 3시간


 




장충체육관

- 홈페이지 : 장충체육관 http://new.sisul.or.kr
서울 중구 장충동2가에 있는 장충체육관(奬忠體育館)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실내 종합경기장으로 1963년 2월 1일에 개관하였다. 체육관에서는 국내/해외의 스포츠경기 외에도 국제경연대회 및 콘서트, 마당놀이 등의 문화공연 등 각종 행사가 펼쳐진다.
체육관 외부는 원의 형태이고 돔으로된 지붕을 가지고 있다. 체육관 내부의 원형 코트는 배구, 농구, 핸드볼 경기가 가능하며, 코트를 중심으로 본부석 및 하단 가변 관람석과 상단 관람석이 위치해서 중앙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며, 각 관람석의 위치에 따른 시각적 사각지대를 만들지 않는다.

*2015년 1월 17일 리모델링 후 재개관





장충단공원

남산의 동북쪽 기슭에 있는 장충단 공원은 조선조 영조 때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이 있던 자리이다.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 등 많은 장병들이 일본인들을 물리치다가 죽음을 맞았다. 이에 고종 황제는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1900년 11월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짓는다. 그 자리가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이다. 이후 1908년까지 매년 춘추로 제사를 올렸다. 사당은 한국전쟁 중 파괴되고 사라져 버렸다. 1969년 장충단에 세워졌던 비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장충단이 공원으로 된 것은 1919년. 일제는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박문사라는 절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였으나 광복 후 일제가 세운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다.

1984년 9월 22일 건설부고시 제374호로 근린공원이 된 장충단공원은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 합병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구역은 장충단공원이라는 예전의 이름 그대로 불리고 있다. 장충단공원 일대는 장충단비, 수표교, 승정전, 관성묘, 와룡묘 등 문화재를 비롯하여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와 유관순, 이준열사, 김용환 선생 동상 등이 있는 항일운동과 관련된 애국충정이 깃든 민족공원이라 할 수 있다.





광희문

광희문

- 홈페이지 : http://www.junggu.seoul.kr/tour/
광희문은 태조 5년(1396) 도성 창건 때 동남쪽에 세운 소문이다. 광희문은 실질적인 도성의 남소문으로 이를 흔히 수구문으로 불렀다. 청계천이 흘러 나가는 곳에 세워진 수구가 거리상으로는 광희문보다는 동대문이 가깝지만, 남소문이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따로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수구문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구문은 실제로는 시구문으로 이용되었으니, 서쪽의 서소문과 함께 도성내의 장례행렬이 동쪽 방향으로 지날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임진왜란으로 도성과 궁성이 파괴될 때 광희문도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숙종 때 기록을 보면 남소문과 광희문의 자리를 혼동하기도 하고, 성문 터과 군영의 위치 확인도 어려울 정도로 파괴된 도성을 수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광희문은 도성 수축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숙종 37년(1711)에 중건에 착수하는데, 수구문을 다시 쌓고 아울러 문루도 조성하게 하였다. 수구문은 심하게 파괴되어 석축을 새로 개수하는데 시일이 많이 걸리므로 서대문 지역을 담당하는 아문에 목재를 넘겨 주어 돈의문 문루를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성문이 수축되고 그 이후 언제 문류가 중건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숙종 45년(1719)에 수구문은 옛 이름이 광희문이니, 해당 군문에서 액호를 써서 걸 것을 요청하자 대리청정하던 세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영조 때에 도성의 문루가 없는 성문을 중건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에 광희문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1759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성도에는 당시 문류유무에 따라 성문을 그렸는데 수구문에는 문루가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광희문은 숙종 때에 재건된 것으로 확인된다.
광희문은 일제가 전차궤도를 부설하면서 성곽을 철거할 때도 문과 문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문루가 파고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 후 1975년에 도로 중간에 위치하게 되어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옮기는 이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1975년 11월에 준공되었다.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갔고, 병자호란(1636)때에는 임금이 역시 이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일본 사신들은 옥수동 두모포나루로 한강을 건너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숙소인 동평관으로 향하였다. 성문은 서울성곽의 다른 소문과 같이 장방형 무사석으로 높게 축조한 육축을 마련하고 육축 가운데 홍예를 앞뒤로 설치하여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문루를 조성하였다.





점심식사(전원)

점심식사(전원)

- 전화번호 : 02-2278-3096
전원은 패션디자이너 출신 문분선씨가 15년째 손맛을 선보이는 한정식 전문점으로, 경상도 음식을 중심으로 하는 해산물과 채소 위주의 한식당이다.





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한옥마을

- 홈페이지 : http://hanokmaeul.or.kr
1998년 조성된 남산골한옥마을은 남산 북측 옛 수도방위사령부 부지 총 79,934m²(24,180평)에 한옥 5동, 전통공예관, 천우각, 전통정원, 서울남산국악당, 새천년타임캡슐 광장으로 구성되어 시민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번화한 도심 한 가운데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거리를 만나볼 수 있으며, 남산 자락을 따라 전통조경 양식으로 조성된 계곡과 정자, 각종 화초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전통정원 가장 높은 곳에는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하고 400년 후 서울정도 천년을 기대하며 1994년 당대의 기억을 매설한 서울천년타입캡슐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옛 가옥을 복원해 놓은 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한옥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연못 청학지와 그 곁으로 천우각이 있다. 천우각 광장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서울 곳곳에 있던 한옥이 이전•복원되어 옛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볼 수 있게 한 예스러운 공간이 나타난다.

모두 다섯 채의 한옥으로서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옥인동 윤씨 가옥이 있다. 이 중 건물 이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은 옥인동 윤씨 가옥만 새 자재를 사용해 복원했고 나머지 건물은 종래의 집 부재를 그대로 이전했다.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즐기는 다양한 체험거리 남산골한옥마을에는 다양한 체험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한옥 다섯 채를 활용하여 한옥실내 공간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한국 전통문화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 한복 입기, 한지 접기, 한글 쓰기, 전통차 마시기를 체험할 수 있고, 전통예절학교와 한방체험도 운영하고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에는 전통혼례가 실제로 치러지고 전통혼례체험도 운영하고 있다. 그 밖에도 천우각 맞은편 원두막에서는 짚공예 시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천우각 무대에서는 태권도 시범공연과 체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피금정 마당에서는 제기차기, 윷놀이, 비석치기 등과 같은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어 가족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또한 남산골한옥마을 곳곳을 동행하며 설명해주는 전통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해 있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 전통한옥
1) 오위장 김춘영 가옥(구 김홍기 가) : 조선조 말기 오위장(군대 하급장교)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으로,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옮겨다 놓았다.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서민 주택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안방의 뒤쪽 벽, 즉 길가 부분에 화방벽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특징이다.
2) 도편수 이승업 가옥(구 조흥은행 관리가) :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될 때 도편수(조선말당시 목수의 우두머리) 이승업이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에 있던 것을 이전했다.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있으며, 안채는 '정(丁)'자형, 사랑채는 'ㄴ'자형이다. 전후연의 지붕길이가 다르게 꾸민것이 특색이다.
3)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구 정구엽 가): 순종의 장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 윤비가 동궁의 계비로 책봉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집이다.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전하였으며, 가옥전체 분위기는 살림집이라기보다는 재실용도에 걸맞게 되어 있다.
4) 관훈동 민씨 가옥 : 이 집은 민영휘(閔泳徽,1852~1935)의 저택 가운데 일부로, 그는 관훈동 일대 너른 땅에다 집을 여러 채 짓고 일가붙이와 함께 살았는데, 옛 터의 위치는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였다. 원래 집터에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별당채와 대문간채, 행랑채 같은 집채가 있었다고 전하나 나중에 소유자가 바뀌면서 안채와 여기에 연결된 중문간채만 남기고 모두혈렸었으며, 1998년 남아있던 안채를 옮겨 지으면서 철거되었던 건넌 방 쪽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를 새로 지은 것이다.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채를 구성하였으며 담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누어 배치하였으며, 보통 서울지방 안채는 안방 앞쪽에 부엌을 둬서 ‘ᄀ자형’으로 꺾어 배치하는 편인데, 이 집은 드물게 부엌과 안방을 나란히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고주 두 개를 세워 짠 넓고 큰 목조구조와 여섯 칸에 달하는 부엌의 규모, 그리고 마루 밑에 뚫려있는 벽돌 통기구 등은 당시 일반 가옥과 다른 최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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