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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도보 추천 코스

[서울 종로구][도보 추천 코스] 3·1운동의 정신을 느껴보는 서울 여행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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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정신을 느껴보는 서울 여행

대한 독립 만세! 3.1운동과 관련된 의미있는 역사 속 현장을 따라 걸으며, 서울을 색다르게 여행해보자. 3.1운동 당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그 뜻깊은 장소에서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되새겨보며 독립의 정신을 다시 한번 느껴보는 시간을 갖자.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2km
- 코스 일정 : 기타
- 코스 테마 : ----지자체-----





독립선언서 배부터(승동교회)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5 - 홈페이지 : http://www.seungdong.or.kr
승동교회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교회로 출발하였다. 승동교회는 경기도 내 장로교회의 모교회적(母敎會的)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교회의 설립 과정을 보면 먼저 헤론(John W. Heron)이 1894년 동현(銅峴)에 홍문동교회(弘文洞敎會)를 세웠다. 이 교인 중에는 독립협회계(獨立協會系) 인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선교사를 구타하여 축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로 교인들은 분파되어 각기 교회를 세웠다. 독립협회계 교인들은 1904년 승동교회를 세웠고, 백정이나 천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안동교회를 세웠다.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 지하에서는 당시 경성의 각 전문학교 대표자 20여명이 모여 3ㆍ1운동의 지침과 계획을 논의한 바 있다. 또 이 교회에서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가 창립되어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봉사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 때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승동교회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 약 200평 규모이며, 설계자와 시공자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주변 건물에 가려 본래의 당당한 위풍을 볼 수 없으나, 설립 당시에는 주변 건물에 비해 높고 당당한 건물이었다. 지붕 형태는 십자형 박공지붕인데, 전면의 박공은 크고, 측면의 박공은 2단으로 처리되었는데 현재는 내부의 제단을 넓히면서 후면에 2단 박공처리되었다. 정면에서 중앙부는 대형 아치창(현재는 현대적인 사각창호로 개조됨)을, 그 좌우는 소형 아치 개구부(현재는 현대적인 출입구로 개조됨)를 두고, 박공에는 원형 창을 냈다. 승동은 인사동에 편입되었으나, 설립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 시대 : 1904년, 1957년 증개축
* 규모·양식 : 지하 1층, 지상 2층, 면적 773.56㎡, 로마네스크풍

승동예배당(3·1독립운동기념터)
승동예배당(3·1독립운동기념터)
승동예배당(3·1독립운동기념터)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8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7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4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2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1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6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5




독립선언서 배부터(승동교회)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5 - 홈페이지 : http://www.seungdong.or.kr
승동교회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교회로 출발하였다. 승동교회는 경기도 내 장로교회의 모교회적(母敎會的)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교회의 설립 과정을 보면 먼저 헤론(John W. Heron)이 1894년 동현(銅峴)에 홍문동교회(弘文洞敎會)를 세웠다. 이 교인 중에는 독립협회계(獨立協會系) 인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선교사를 구타하여 축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로 교인들은 분파되어 각기 교회를 세웠다. 독립협회계 교인들은 1904년 승동교회를 세웠고, 백정이나 천민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안동교회를 세웠다.

1919년 2월 20일 이 교회 지하에서는 당시 경성의 각 전문학교 대표자 20여명이 모여 3ㆍ1운동의 지침과 계획을 논의한 바 있다. 또 이 교회에서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가 창립되어 여성들의 사회활동과 봉사에 일익을 담당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승동교회는 일제 때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승동교회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 약 200평 규모이며, 설계자와 시공자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주변 건물에 가려 본래의 당당한 위풍을 볼 수 없으나, 설립 당시에는 주변 건물에 비해 높고 당당한 건물이었다. 지붕 형태는 십자형 박공지붕인데, 전면의 박공은 크고, 측면의 박공은 2단으로 처리되었는데 현재는 내부의 제단을 넓히면서 후면에 2단 박공처리되었다. 정면에서 중앙부는 대형 아치창(현재는 현대적인 사각창호로 개조됨)을, 그 좌우는 소형 아치 개구부(현재는 현대적인 출입구로 개조됨)를 두고, 박공에는 원형 창을 냈다. 승동은 인사동에 편입되었으나, 설립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 시대 : 1904년, 1957년 증개축
* 규모·양식 : 지하 1층, 지상 2층, 면적 773.56㎡, 로마네스크풍

승동예배당(3·1독립운동기념터)
승동예배당(3·1독립운동기념터)
승동예배당(3·1독립운동기념터)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8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7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4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2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1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6
한국문화정보원_승동교회 5




낙원 악기상가

낙원악기상사 - 홈페이지 : http://www.enakwon.com
- 전화번호 : 02-743-6131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바로 옆에 위치한 낙원악기상가는 70년대 이래로 악기 및 음악 관련 제품과 정보, 서비스만을 취급하고 있는 전문상가로,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330여 개에 이르는 악기점에서 기타, 관현악기, 타악기, 국악기와 첨단 전자악기 및 앰프와 스피커 등 각종 음향과 방송설비의 국내외 최신 제품과 정보를 얻고 구매할 수 있으며, 고가의 최신 제품뿐만 아니라 중고품의 교환과 판매도 가능해서 피아노 등 중고품의 수리, 조율 및 교환 등의 서비스도 제공된다. 또, 각종 행사의 악기 및 음향장비 대여 서비스도 가능하다. 같은 상가 내에 복합 상영관인 할리우드 극장도 있어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와 함께 종로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최근의 리뉴얼 이후로 일요일에도 개장하여 더욱 쾌적한 쇼핑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낙원악기상가_03
낙원악기상사
낙원악기상사
낙원악기상사
낙원악기상사
낙원악기상사




탑골공원

탑골공원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댕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탑골공원은 광무 1년(1897) 총세무사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꾸며진 현대식 공원이며, 1919년 3·1운동 당시 시내 청년 학도와 애국시민이 이곳 파고다 공원에 모여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탑골공원
탑골공원
탑골공원
탑골공원
탑골공원




낙원 악기상가

낙원악기상사 - 홈페이지 : http://www.enakwon.com
- 전화번호 : 02-743-6131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 바로 옆에 위치한 낙원악기상가는 70년대 이래로 악기 및 음악 관련 제품과 정보, 서비스만을 취급하고 있는 전문상가로,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330여 개에 이르는 악기점에서 기타, 관현악기, 타악기, 국악기와 첨단 전자악기 및 앰프와 스피커 등 각종 음향과 방송설비의 국내외 최신 제품과 정보를 얻고 구매할 수 있으며, 고가의 최신 제품뿐만 아니라 중고품의 교환과 판매도 가능해서 피아노 등 중고품의 수리, 조율 및 교환 등의 서비스도 제공된다. 또, 각종 행사의 악기 및 음향장비 대여 서비스도 가능하다. 같은 상가 내에 복합 상영관인 할리우드 극장도 있어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와 함께 종로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최근의 리뉴얼 이후로 일요일에도 개장하여 더욱 쾌적한 쇼핑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낙원악기상가_03
낙원악기상사
낙원악기상사
낙원악기상사
낙원악기상사
낙원악기상사




천도교중앙대교당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1 - 홈페이지 : 종로구 문화관광 http://tour.jongno.go.kr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우리나라 천도교의 총본산이다. 천도교는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3대 교주 손병희는 1904년 이용구가 일진회와 합하여 친일 행위를 자행하자, 이와 구별하기 위해 천도교로 1905년 개칭하였다. 개칭한 이후, 1906년 1월 『천도교 대헌』을 반포하고 교단을 새롭게 조직하였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였으며, 3·1운동 당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던 천도교는 광복 이후 북한 지역 교세의 급격한 증가에 힘입어 크게 확장되었다가 한국전쟁으로 다시 쇠퇴하였다. 1953년에 중앙 총부를 서울로 옮겼으며, 1961년에는 최시형과 손병희의 법설(法說)이 포함된 『천도교 경전』을 간행하였다. 중앙대 교당은 천도교의 종교 의식 및 각종 정치집회, 예술 공연 등의 일반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붉은 벽돌로 고풍스럽게 지어진 4층 건물이다. 제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건축하기로 결정하여 교인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일본인 중촌여자평(中村與資平)이 했으며,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시공하고, 일본인 기사 고곡호시(古谷虎市)가 총감독을 맡아 완공하였다. 기초부는 화강석으로 벽체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지붕 옆면이 사람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인데, 철근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하였다. 또한, 앞면에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풍으로 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시내 3대 건물의 하나로 꼽혔으며, 교회당의 구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총 건평은 927.87m²(280.68평)으로 약 800명에서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다. 중앙대교당 옆으로는 현재 천도교의 사무실이 있는 수운회관이 있다.
서울_종로_천도교중앙대교당03
서울_종로_천도교중앙대교당04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1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2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3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4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5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7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10




천도교중앙대교당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1 - 홈페이지 : 종로구 문화관광 http://tour.jongno.go.kr
천도교중앙대교당은 우리나라 천도교의 총본산이다. 천도교는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3대 교주 손병희는 1904년 이용구가 일진회와 합하여 친일 행위를 자행하자, 이와 구별하기 위해 천도교로 1905년 개칭하였다. 개칭한 이후, 1906년 1월 『천도교 대헌』을 반포하고 교단을 새롭게 조직하였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였으며, 3·1운동 당시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던 천도교는 광복 이후 북한 지역 교세의 급격한 증가에 힘입어 크게 확장되었다가 한국전쟁으로 다시 쇠퇴하였다. 1953년에 중앙 총부를 서울로 옮겼으며, 1961년에는 최시형과 손병희의 법설(法說)이 포함된 『천도교 경전』을 간행하였다. 중앙대 교당은 천도교의 종교 의식 및 각종 정치집회, 예술 공연 등의 일반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붉은 벽돌로 고풍스럽게 지어진 4층 건물이다. 제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건축하기로 결정하여 교인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일본인 중촌여자평(中村與資平)이 했으며, 중국인 장시영(張時英)이 시공하고, 일본인 기사 고곡호시(古谷虎市)가 총감독을 맡아 완공하였다. 기초부는 화강석으로 벽체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건물의 기초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지붕 옆면이 사람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인데, 철근 앵글로 중간에 기둥이 없게 하였다. 또한, 앞면에 2층 사무실을 탑 모양의 바로크풍으로 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서울시내 3대 건물의 하나로 꼽혔으며, 교회당의 구조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총 건평은 927.87m²(280.68평)으로 약 800명에서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다. 중앙대교당 옆으로는 현재 천도교의 사무실이 있는 수운회관이 있다.
서울_종로_천도교중앙대교당03
서울_종로_천도교중앙대교당04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1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2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3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4
무장애_서울_천도교중앙대성당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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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탑골공원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유서 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댕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원각사지 10층 석탑, 보물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탑골공원은 광무 1년(1897) 총세무사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꾸며진 현대식 공원이며, 1919년 3·1운동 당시 시내 청년 학도와 애국시민이 이곳 파고다 공원에 모여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탑골공원
탑골공원
탑골공원
탑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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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에서 '23년'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문 관광정보 서비스'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한국관광공사,https://kto.visitkorea.or.kr/kor.kto'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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