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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나홀로 추천 코스

[전남 나주시][나홀로 추천 코스] 고려와 조선을 잇는 나주 역사 기행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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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을 잇는 나주 역사 기행

견훤은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후백제를 세웠고, 고려 태조 왕건은 나주 완사천에서 훗날의 장화왕후와 연을 맺었다. 나주는 고려 성종 때 나주목이 된 이래 천년 목사 고을로 불리는 고장이다. 전주와 나주의 지명을 한 자씩 따서 ‘전라도’라 이름 붙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나주는 천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고장이라 할 만하다.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31.8km
- 코스 총 소요시간 : 5~6시간


 




나주향교

나주향교

- 홈페이지 : http://www.naju.go.kr/tour
http://www.cha.go.kr
1407년(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이 향교에는 1701년(숙종 27)에 창건한 계성사(啓聖祠)가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교궁(校宮)의 배치가 다른 향교와는 크게 다른 특색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교궁의 배치는 대성전이 위에 있고 그 밑에 명륜당이 위치하고 있으나,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하는 계성사가 있는 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가 바뀐 것이 특색이다. 호남지방의 향교 중 계성사가 있었던 곳으로는 나주향교 이외에 전주향교와 함평향교 등이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신학제 실시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소장 전적 145종 195책 중 필사본인 ≪금성연계방안 錦城蓮桂榜案≫•≪유림안 儒林案≫•≪청금안 靑衿案≫•≪통문 通文≫ 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나주목사내아

나주목사내아

- 홈페이지 : http://www.naju.go.kr/moksanaea/
나주목사내아는 조선시대 나주목사의 관저로서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평면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채는 순조 25년(1825년) 건립된 것으로 건물 구조는 전통 양식인 한옥 ㄷ자형이다. 나주목사내아는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나주는 조선시대 관아건물이 많이 남아있어 문화유적 답사지로서 적합하다.

* 규모 - 내아 1동, 행랑채 1동





운흥사(나주 운흥사)

운흥사(나주 운흥사)

운흥사는 덕룡산 기슭에 있는 고찰이었다. 1775년 정문(鄭文)이 쓴 진여문4중창기(眞如門四重創記)에 의하면 당 희종년간(846∼887)에 도선국사가 이곳의 지세가 좋아 흥덕으로부터 와서 이곳 도성암(道成庵)에서 첫 강회를 열고 터전을 닦은 후 신라 효공왕 년간(897∼911)에 이곳에 웅점(熊岾)에 웅치사(熊峙寺) 창건하였다. 그후 언제인가 운흥사로 바꾸었다. 1775년 당시에는 대웅전 침계루 등 380여칸의 규모를 갖춘 사찰로 확인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현재는 빈약한 사찰이다. 나주 운흥사 석장승(중요민속자료 제12호)은 사찰입구 길가에 있는데 우측이 여장생, 좌측이 남장생으로 되어 있다. 여장생은 하원당 장군(下元唐將軍)이라 음각된 얇고 넓은 돌 장승인데 불회사의 여장생처럼 온화한 맛이 없는 원시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한 인상을 하고 있다.

좌측의 남장생은 거대해서 위엄이 있으나 안면이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 특유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 또 큰 치아 두 개가 입의 좌우에 노출되어 있고 수염이 턱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불회사 장생과 운흥사 장생이 다른 점은 불회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 남상이고 좌측이 주장군으로 여상인데 반해서 운흥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으로 여상이고 좌측이 주장군(周將軍)으로 남상이 되어 위치와 새긴 글씨가 서로 뒤바꿔져 있다. 그러나 그 조각법과 원형의 눈동자 등 형태가 거의 흡사한데다 여상인 하원당장군의 뒷면에 강희 58년(1719년)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서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민속자료이다. 한편 여인들이 치성을 드린 흔적인 수혈이 많이 남아 있는 바위가 있어 민간신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 민간신앙이 단면을 볼 수 있는 장승, 운흥사석장승 *

중요민속자료 12호(1968년 12월 12일 지정)운흥사 석장생은 사찰입구 길가에 있는데 우측이 여장생, 좌측이 남장생으로 되어 있다. 제작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17∼18세기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여장생은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라 음각된 얇고 넓은 돌장승인데 불회사의 여장생처럼 온화한 맛이 없는 원시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한 인상을 하고 있다. 좌측의 남장생은 거대해서 위엄이 있으나 안면이 온화하고 인자한 노인 특유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 또 큰 치아 두 개가 입의 좌우에 노출되어 있고 수염이 턱밑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불회사 장생과 운흥사 장생이 다른 점은 불회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 남상이고 좌측이 주장군으로 여상인데 반해서 운흥사는 우측이 하원당장군으로 여상이고 좌측이 주장군(周將軍)으로 남상이 되어 위치와 새긴 글씨가 서로 뒤바꿔져 있다. 그러나 그 조각법과 원형의 눈동자 등 형태가 거의 흡사한데다 여상인 하원당장군의 뒷면에 강희 58년(1719년)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서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민속자료이다. 한편 여인들이 치성을 드린 흔적인 수혈이 많이 남아 있는 바위가 있어 민간신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불회사(나주 불회사석장승)

불회사(나주 불회사석장승)

- 홈페이지 : http://www.bulhoesa.org
불회사는 백양사의 말사로, 운흥사터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덕룡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동진 태화 원년 (366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창건되었고 희연조사 2창, 조선 태종 2년(1402) 원진국사가 3창하고, 정조 22년(1789) 큰 화재로 건물이 대부분 불타버린 것을 1800년 중건하였다. 회사는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화려함은 없지만, 호젓한 분위기로 사람을 붙잡는다. 대웅전(국가 보물)과 명부전, 삼성각, 나한전, 요사채가 동백숲을 뒤에 두르고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특히 대웅전에 안치된 삼존불 중 비로자나불은 종이로 만든 지불로 유명하다. 계곡은 깊지 않아 산의 참맛은 덜 하나 절 주위의 전나무, 삼나무, 비나무 등의 숲은 아늑한 분위기를 이룬다. 단풍이 가장 늦게 드는 지역으로 그 빛깔이 인근에서 가장 아름답다. 절 입구에는 부정을 금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신상인 석장승 한쌍 (중요민속자료)이 서 있다. 할아버지 장승은 툭 튀어 나온 퉁방울눈을 하고, 이맛살을 굵게 찌푸려 남도 특유의 해학적 표정을 짓고 있다. 할머니 장승은 절을 찾는 사람들을 반기는 듯 웃음을 머금은 표정이 다정다감한 할머니의 표정 그대로이다. 할아버지 장승의 키는 2.3미터, 할머니 장승은 1.7미터이다.

* 불회사 창건시기에 대한 두 가지 설화 *
불회사의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하는데, 하나는 384년(침류왕 1)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창건하고 681년(신문왕 1)에 왕명으로 중창되었다고도 하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367년(근초고왕 22)에 희연이 창건하고 713년에 연기가 중창했다는 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의 이름이 불호사로 기록되어 있어 창건 때는 불호사였다가 1808년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절의 중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원진국사는 한때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호랑이의 도움으로 경상도 안동 땅에서 시주를 얻어 대웅전을 중건하게 되었다. 공사가 이루어지자 원진은 좋은 날을 택하여 상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일의 추진이 늦어져 어느새 해가 저물고 말았다. 이에 원진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를 하여 지는 해를 붙잡아두고, 예정된 날짜에 상량식을 마쳤다는 것이다. 이때 원진이 기도하던 자리가 바로 일봉암이라고 한다.

* 나주 불회사석장승 *
불회사 석장생은 사찰 입구 300m 지점 오솔길 좌우에 2기가 있다. 장승의 앞면에는 ‘당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당(唐)자 주(周)자 글씨는 길(道)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당자는 사당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 주자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 2기 중 우측이 남장생이고 좌측이 여장생인데 여장생은 하반신이 지면에 매몰되어 있다. 남장생(하원당장)은 얼굴 조각 선이 깊고 인상적이며 입 좌우에 치아가 각 1본씩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수염을 상징한 굵은 양각 선이 턱 아래에서 좌측으로 40cm쯤 내려와 있다. 얼굴이 남자상으로 선이 뚜렷하고 머리에서 중앙을 솟아오르게 하여 옛날 상투를 뜻한 것으로 보인다. 각자는 원래 「하」인데 후세에 누구인지 장난삼아「정」자로 판 것 같다. 좌측 여장생(주장군)은 남장생에 비해 얼굴이 여성적으로 온화하며 웃는 인상이고 부드럽고 평면적이다. 장생은 마을 수호신으로서의 장생과 이정표로서의 장생, 경계를 표시하는 장생이 있는데, 세워진 장소는 주로 사찰 입구, 마을, 성문 밖, 경계 길가 등이다.

* 장생과 불회사 석장승 *
「장생」이란 문자가 문헌상으로 나타난 가장 오래인 것은 신라 경덕왕 18년(759년)으로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에 「이때가 건원 2년인데 특별히 교지를 내려 장생표주를 세우게 했는데 지금도 볼 수 있다.(是以乾元二年 特敎植 長生標柱 至今存焉)」이란 기록이 보인다. 불회사 석장생의 제작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불회사의 인근에 있는 운흥사 석장생(하원당장군)의 조각 형태와 그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운흥사 석장생이 만들어진 강희 58년(1719년)을 전후하여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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