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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나홀로 추천 코스

[경북 영주시][나홀로 추천 코스] 선조들의 유유자적한 삶을 엿보러 영주로!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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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유유자적한 삶을 엿보러 영주로!

어머니 품같이 넉넉한 소백산 줄기아래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영주. 그곳에 가면 과거와 현재의 모든 길이 공존하고 있다. 그 길을 달리다 보면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게 된다. 욕심과 싸움이 없는 조금 다른 일상, 영주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42.66km
- 코스 총 소요시간 : 1일


 




부석사(영주)

부석사(영주)

- 홈페이지 : http://www.pusoksa.org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676)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王命)으로 창건(創建)한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이다. 대사가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道理)로 국론(國論)을 통일(統一)하여 내외(內外)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華嚴思想)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불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리웠다. 1916년 해체보수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高麗)초기에 무량수전(無量壽殿)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恭愍王) 7년 (1358)적의 병화(兵火)를 당하여 우왕(禑王)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 (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석조기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조사당(국보제19호),소조여래좌상(국보제45호),조사당벽화(국보제46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여래좌상은 국내에 전래하는 최고의소상(塑像)이다.무량수전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룡(護法龍)이 살았다는 우물이라 전한다.

* 문화재 -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 조사당(국보 제19호),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4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제255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소수박물관

소수박물관

- 홈페이지 : 소수서원 http://www.yeongju.go.kr/open_content/sosuseowon/page.do?mnu_uid=3340&
고대로부터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민족의 정신문화, 유교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하여 민족 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민족문화의 전당이다.
이곳은 조선유학의 메카답게 서원과 관련한 귀중한 문화유산과 유학의 전말을 눈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유교박물관이다.
소수박물관은 2004년 9월 22일 개관을 시작으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함으로써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다가갈 것이다.





선비촌

선비촌

- 홈페이지 : http://www.sunbichon.net
유교문화 발상의 중심지로서 옛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선현들의 학문 탐구와 전통생활 모습의 재현을 통하여 관광자원화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광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며, 우리 전통적 고유사상과 생활상의 체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선비촌은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시켜 보고자 충효의 현장에 재현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소수서원과 연계되는 영주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그리고 역사관 확립을 위한 산교육장으로 활용될 것이다. 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오감체험형전시와 참여형 이벤트, 전통문화체험의 기회가 수시로 제공되는 선비촌의 각종 기획프로그램에서 옛 선비들의 당시 생활상을 통해 잊혀져가는 수준높은 전통문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 부지면적 - 57,717㎡(17,460평)
* 전시가옥 면적 - 2,651㎡(802평)
* 주요규모 - 와가 7가구, 초가 5가구, 누각 1동, 정사 2동, 정려각 2동,성황당 1동, 곳집 1동, 원두막 1동, 저자거리
* 수신제가(修身齊家)
김상진家, 해우당고택, 강학당'수신제가(修身齊家)’란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가꾼다는 뜻이다.선비들은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학문을 힘쓰며 일상의 생활윤리를 실천하는 일,곧 수신(修身)을 중요시했다. 이는 유학의 실천적인 학풍에 의한 것으로 선비들은 수신을 위해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공부하고 바르게 실천하는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신제가의 공간에서는 자기수양을 위해 노력했던 영주 선비의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교육방식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입신양명(立身揚名)
두암고택, 인동장씨종가'입신양명(立身揚名)’이란 사회에 진출하여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이다. 옛 선비들에게 과거시험을 통한 관료의 길은 수신제가(修身齊家)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즉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얻는 일이었다.입신양명의 공간에서는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영주 선비의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 거무구안(居無求安)
김문기家, 만죽재, 정사'거무구안(居無求安)’이란 사는데 있어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살아갈 길을 고민하였다.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는 것을 인격수양의 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무구안의 공간에서는 명상과 풍류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지않고 현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영주 선비의 굳은 기개를 엿볼 수 있도록 하였다.

*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김세기家, 김뢰진家, 장휘덕家. 이후남家, 김규진家, 두암고택가람집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란 가난함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비록 살림살이가 어렵더라도 잘사는 것에 욕심이 나서 선비의 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곤궁함으로 인해 가볍게 스스로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우도불우빈의 공간에서는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영주 무섬마을

영주 무섬마을

- 홈페이지 : https://www.yeongju.go.kr/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 예천의 회룡포, 영월의 선암마을과 청령포와 같이 마을의 3면이 물로 둘러 쌓여 있는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영주천이 합수되어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를 끼고 마을의 삼면을 감싸듯 휘감아 돌아 마치 섬처럼 육지속의 섬마을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강변에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편으로는 울창한 숲이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무섬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으로 반남박씨인 박수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이후 조선 영조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예안김씨인 김대가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반남박씨와 예안김씨 두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현재 약 48가구에 1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가옥중 38동이 전통가옥이고,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예안김씨는 선성김씨라고도 하는데 현재 종친회에서 정식으로 부르는 이름은 예안김씨라고 한다.

해우당과 만죽재가 특히 알려져 있으며, 김규진 가옥, 김위진 가옥 등 9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우당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수도교를 건너자 마자 바로 왼편으로 보이는 가옥이다. 해우당은 19세기 말 의금부 도사를 지낸 김낙풍이 지은 집인데 해우당은 그의 호이다. 해우당 김낙풍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조언자였다고 한다. 해우당 고택에 있는 현판은 바로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안채에는 역시 흥성대원군이 쓴 '대은정'이라는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무섬마을에서 또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가옥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죽재이다. 반남박씨의 입향조인 박수가 1666년(헌종7년)에 지은 집으로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이다. 만죽재는 무섬마을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죽재의 편액은 석운 박기양의 글씨이다. 또한 마을의 중앙에는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만운고택이 있다. 민속자료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는 집이며, 이집을 지은 만운 김휘걸의 호를 따서 지은 집이다. 바로 시인 조지훈의 처갓집이다. 조지훈은 시 '별리'를 통해 이곳 무섬마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 한다.

이외에 무섬마을의 대표적인 부잣집 가옥인 김위진 가옥(문화재 자료 제360호), 담장없이 지어진 김정규 가옥(문화재 자료 제 362호), 실학자 박규수의 글씨가 남아 있는 박재연 고택 등도 둘러 보아야 할 전통 가옥이다. 무섬 마을에는 또 한가지 빼놓지 말아야 할 볼거리가 있다. 바로 350여년간 무섬 마을과 강건너를 연결시켜준 외나무다리이다. 1979년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무섬마을의 유일한 통로 역활을 한 외나무 다리는 길이가 무려 150m에 이르고, 폭은 30cm에 불과한 다리 이다. 폭이 좁아 긴 장대에 의지한채 건너야 한다. 외나무 다리는 해마다 새로 다리를 만들었는데, 장마철이면 불어난 강물에 다리가 떠내려 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도교의 건설로 사라졌던 외나무 다리는 최근 옛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매년 10월에 '외나무다리 축제'를 만들어가는 중심이 되고 있다. 원래 외나무 다리는 3개가 만들어 졌었다고 한다. 농사지으러 가는 다리, 장보러 가는 다리, 학동들이 학교 가는 다리. 지금은 농사지으로 가는 다리 하나만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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