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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가족 추천 코스

[충남 공주시][가족 추천 코스] 곰 여인의 전설이 강물 되어 흐르네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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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여인의 전설이 강물 되어 흐르네

고마나루는 공주의 관문으로 백제시절 서해에서 금강을 따라 올라온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다. 또 인간세상을 동경한 곰 여인의 전설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고마나루에는 곰 사당이 남아있다. 시간이 넉넉하면 고마나루에서 시작한 공주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자.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54.45km
- 코스 총 소요시간 : 1일


 




마곡사

마곡사

- 홈페이지 : http://www.magoksa.or.kr
공주 문화관광https://www.gongju.go.kr/tour/index.do
“마곡사 사적입안(事蹟立案)”의 기록에 따르면,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자장(慈藏)이 창건하였으며, 고려 명종(明宗) 때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범일(梵日)이 재건하였으며, 다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고, 순각(淳覺)이 보수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려 ‘영산전(靈山殿)’이라고 사액(賜額)을 한 일이 있다. 창건 당시에는 30여 칸의 대사찰이었는데, 현재는 대웅보전(보물 801)•대광보전(大光寶殿:보물 802)•영산전(보물 800)•사천왕문•해탈문(解脫門) 등이 있을 뿐이다. 이 밖에 사보(寺寶)로는 5층 석탑(보물 799)•범종(梵鐘:지방유형문화재 62), 괘불(掛佛) 1폭, 목패(木牌), 세조가 타던 연(輦), 청동 향로(지방유형문화재 20)가 있고,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270) 및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269)이 있다. 금물이나 은물로 베껴 쓴 필사 불경들이 지금도 여러 점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려후기 불교문화의 대표적 유산이기도 하다. 이 절과 관련해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일대가 조선조 십승지지, 즉 전란기에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마곡사는 임진왜란의 전란을 피하였으며, 한국전쟁 때도 병화를 입지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 마곡사의 역사 *
마곡사의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이 설법 전도할 때 모인 신도가 삼밭의 삼대 같다고 하여 마곡사라 지은 것이라 한다. 절에서 내려오는 얘기로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2년)에 자장 율사가 창건하여 고려 보조국사가 재건하였다 하나, 그 처음 연원이 확인되지 않고 있고 전하는 연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선덕여왕 12년은 백제 멸망이전 백제 의자왕 2년에 해당한다. 만일 642년 창건이 사실이라면, 의자왕 2년으로 전해져야 하는데 적대관계의 신라 연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 정보]
마곡사5층석탑(보물 799호) / 마곡사영산전(보물 800호) / 마곡사대웅보전(보물 801호) / 대광보전(보물 802호) /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1(보물 269호) / 감지은니 묘법연화경 권6(보물 270호) / 천왕문(문화재자료 62호) / 응진전(문화재자료 65호) / 명부전(문화재자료 64호) / 동제은입향로(문화재자료 20호) / 해탈문(문화재자료 66호) / 동종(문화재자료 71호) / 심검당 및 고방(문화재자료 135호) / 국사당(문화재자료 63호) / 세조대왕가마(문화재자료 14호) / 괘불(문화재자료 345호)





공주 공산성

공주 공산성

- 홈페이지 : http://www.gongju.go.kr/prog/tursmCn/tour/sub02_01_04/view.do?cntno=14
* 백제 문주왕 시절의 산성, 공산성 *
공주 시내 산성동에 있는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1년(475)에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이다. 사적 제12호인 공산성은 총 연장 2,660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의 요지이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백제시대의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 때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 안에는 웅진 도읍기로 추정되는 왕궁지를 비롯해 백제시대 연못 2개소, 고려시대 때 창건한 영은사,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과 사적비, 남문인 진남루, 북문인 공북루 등이 남아 있다. 동문과 서문은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주변에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공산성은 역사와 문화가 함께 정이 깃든 수려한 자연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있게 보여지고 있다. 가족 단위, 부부, 연인들이 금강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산책할 성벽길이 있고 우거진 숲과 숲사이의 산책로가 있다. 계룡산과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오고 비단결 같은 금강이 발 아래에서 찰랑거린다.

* 공산성의 유래 *
공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 공산성 서쪽에 위치한 정각, 공산성 쌍수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1984.05.17 지정) *
쌍수정은 공산성 진남루 부근의 서쪽 고지대에 위치한 정각이다. 원래 그 터는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산성 파천시 머물렀던 장소이며, 이 곳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인조는 환도시 쌍수에 정3품 대부작을 하사하였는데 그 후 나무는 죽고 구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유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관찰사 이수항이 영조 10년에 쌍수정을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정조 11년, 고종 7년, 1947년에 걸쳐 중수되어 오다가 1970년에 건물은 전면 해체되고 새로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복원된 쌍수정의 건물은 본래의 형상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한다. 자료에 의하면 건물은 이층의 누각이며 누각 주변에 담장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의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익공 계통의 건물로 조선 후기 전형적 누각의 형상을 모방하고 있지만, 원형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공산성의 남문, 공산성 진남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1984.05.17 지정) *
공산성의 출입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이 진남루는 성의 남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로 대칭시켜 조성한 후 두 석축 기단에 걸쳐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내고 있다. 원래 토성이었던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석축성으로 개축된 것은 조선 초기의 일로 이 진남루 역시 그때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후 여러 차례 수축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 전부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 공산성 추정왕궁지 *
공산성 내 서쪽의 표고 85m의 정상부, 종래 쌍수정 광장으로 불려 왔던 약 6,800㎡의 면적이 추정 왕궁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임류각은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980년에 조사된 임류각지에서 서쪽으로 왕궁이 입지할 수 있는 위치는 이 곳 밖에 없다는 논거로 1985년부터 1986년에 걸쳐 조사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유적은 건물지를 비롯하여 용수를 저장할 수 있는 연못과 목곽고 및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이들 유구나 또는 출토된 유물들이 백제시대로 편년되어 왕궁지의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확인된 건물지로는 반지하식 건물지, 굴건식 주공을 사용한 건물지,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지 2개소와 연지, 저장혈, 목곽고 등이 있다. 건물지는 굴건식 건물지까지는 백제가 웅진으로 남천하기 이전의 유적으로 보고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지는 남천 후, 즉 왕궁지의 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적심석 검물지는 각각 24칸, 10칸 규모였다. 수습된 유물은 대체로 기와류인데 막새기와는 백제의 8엽, 10엽 연화문을 비롯하여 파상문 수막새 기와이고, 10엽 연화문 수막새 기와는 연꽃의 끝부분 반전이 심하게 이루어진 백제 초기의 것으로 공주 공산성에서 주로 출토되는 전형적 형식이다.이외의 평기와 중에는 웅천(熊川) 혹은 관(官)자의 명문이 찍힌 것을 비롯한 각종의 도장문이 나왔다. 토기는 백제토기로 등잔을 비롯하여 개물이나 삼족토기 등이며 특수 유물로 봉황형 금동향로가 수습되었는데 이는 부식이 심하고 출토 위치가 불분명하지만 조사된 건물지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 공산성의 북문, 공산성 공북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1976.01.08 지정) *
공북루는 공산성에 설치된 문루 중 북문으로 성문을 나서면 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게 되어 있다. 선조 36년인 1603년에 옛 망북루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시축 후 수 차례에 걸쳐 개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나 현존의 것은 본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문루 건축의 대표적 예로 꼽는다. 건축의 내용은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동성의 충청도 편에 보면 1603년인 계묘년에 쌍수 산성의 수리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공북, 진남 양문을 건립한 내용을 적고 있어 현존의 공북루 건물의 축조에 대한 기사를 남기고 있다. 본래 현존 공북루의 자리는 망북루가 자리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유지는 공북루의 동쪽 성벽상에 초석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 외형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망북루의 초석은 자연석으로 4매가 지표면에 남아 있지만 이것만으로 건물의 형상을 복원하기는 어렵다. 성문의 건축은 협축형태로 조성된 석성이 절단된 후면에 이층의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면적은 남문인 진남루의 2배 가량이며, 고주를 사용한 이층의 다락집 형태로 고창 읍성의 공북루와 유사한 모습이다. 각 문의 크기는 등간격이며 누의 중앙 어칸에는 출입문을 달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어 근세까지 문비가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백제시절의 누각터, 공산성 임류각지 *
임류각지는 공산성의 산정에 위치한 광복루에서 서쪽으로 약 150m 정도 떨어진 산의 중턱 서향 사면에 위치한다. 임류각은 삼국시대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후, 약 25년이 지난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 (493)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이 남아있는 건물이다. 1980년의 조사에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된 유지는 정비되어 있으며, 건물의 문화적, 학술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본래의 유지에서 약간 위쪽에 새로이 복원되어 있다.임류각에 대한 조사 결과 초석의 배열은 남쪽열에 6매, 동쪽열에 7매를 배치하여 건물은 남변이 5칸, 동변이 6칸이지만 각각 10.4m ×10.4m의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에 사용된 초석은 총 42매였으나, 현재 남아있는 초석은 31매이고 나머지 11매는 결실되어 있다. 초석의 기본형태는 방형이나 2∼3매의 돌을 합하여 1개의 초석을 이루고 있으며, 고층건물을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초석의 상면에 요철을 주어 기둥이 힘을 받고 밀착되도록 하는 소위 그랭이기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기반이 약한 초석 주위에는 굴건식 원형 주공을 만들어 보조 기둥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임류각지의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가 대부분으로, 단판 8엽의 백제 연화문 와당과 후대의 세판 연화문 와당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임류각지는 초석을 지상에 노출시키면서 정비가 이루어져 있다. 더불어 임류각에 대한 복원도 이루어져 정면 6칸, 측면 7칸의 이층 형태의 누각 건물이 광복루 아래 광장에 복원되어 있다.

* 공산성의 동문의 터가 있는 곳, 공산성 동문루 *
공산성 중심부에서 남동방향으로 토성이 위치하였는데 본래 여기에는 공산성의 동문이 있었으나 훼손되어 단지 유지만 남아 전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폭 5m 정도의 토성이 절단된 형태로 남아 있었는데, 1980년에 문지가 조사되어 구체적 형태가 확인되었다. 당시 조사된 문지의 내용을 보면 규모는 문지의 통로길이가 6.54m이고 너비가 2.46m로 남아 있었다. 문지의 양쪽에 문지석 2매가 원위치에 남아 있었고 자연석으로 쌓은 통로벽도 원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2매의 문지석의 상면에는 문설주공이 장방형으로 길이 15㎝, 너비 5㎝, 깊이 5㎝로 파여 있었고, 그 문설주공의 바로 안쪽에는 원형으로된 분지공이 있었는데 지름이 11㎝에 깊이는 7㎝였다. 이러한 크기와 모양은 양쪽의 문지공에서 동일한 것이 었다. 다만 서쪽 문지공의 바닥에는 문초곶이의 마멸방지를 위하여 설치된 무쇠받침도 남아 있었다. 문지석의 전면에는 장대석을 높이대로 놓고 그 위에 큰 면석 하나를 포개어 놓았다. 이렇게 큰 면석을 서쪽에 똑같이 쌓은것은 밖에서 문을 열지 못하게 한 성문의 공통적 형식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지석 양끝에 접해서 통로벽을 쌓았다. 현재 이 공산성의 동문은 정비와 함께 문루가 복원되어 있다. 문루는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 형식에 따른 것이며 규모는 기록에 남아있는 삼칸규모라는 내용에 맞추어 건립한 것이다.

* 공산성 내 연못,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공주공산성연지 - 충청남도 기념물 제42호/1982.12.31 지정) *
연지는 공산성 북쪽의 금강과 영은사(靈隱寺)사이에 있는 연못이다. 공산성에는 우물이 3개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곳과 쌍수정(雙樹亭)남쪽의 것 2개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으나 1982년부터 1983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확인. 정비한 것이다.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연못의 축석상태를 보면, 모두 단을 두어 쌓았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아울러, 축석에 사용된 석재는 비록 정치석되지는 않았지만, 면을 어느 정도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다. 이들의 축조는 매우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으며, 석질은 절석이 잘도는 반암계통을 사용하고 있다.

* 공산성 연못 *
연못은 광장의 전면 남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지면을 깊게 파고 그 안에 자연석을 원형으로 쌓아 만든 것이다. 규모는 상면의 너비가 7.3m이고 바닥의 너비가 3.0m에 깊이는 4.18m이다. 전체적인 형상은 대접형으로 정연한 축석으로 이루어졌는데 원상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축조를 보면 부식된 화강암질인 생토면을 지름 9.5m되게 원형으로 파고 내부에 석축을 한 것이다. 더불어 바닥은 널찍한 판석을 깔았는데 호안석면은 부정형 할석을 연못 안쪽으로 면을 맞추어 1열만 축조한 것이다. 특히 벽면은 위로 쌓아 올리면서 약간 밖으로 휘어 올려 지름이 위로 올라갈수록 넓게 배려한 것이다. 한편 호안석의 후면은 점성이 강한 점토를 1m의 너비정도 채우고 있는데 연못 외변이 동일한 상태이다. 이는 연못 내의 물이 누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이 연못은 추정왕궁지역의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후쳐 있으면서 중심건물로 추정되는 24간 건물의 정면 중앙에 자리한다. 따라서 외형상으로는 조경을 위한 시설인 것으로 추정되나 또다른 기능, 즉 용수 저장을 위한 시설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이는 연못 내의 용수는 외부에서 길어다 채운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한편 연못 안에서 흙이 완전하게 채워져 있으면서 기와나 토기 등의 각종 유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 바 유물들은 전부 백제시대의 것이다. 기와는 평와를 비롯하여 숫막새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숫맛새 기와는 단판 10엽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8엽연화문, 그리고 파상문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연화문 와당은 소판이지만 연판의 반전이 심하고 연판 자체는 풍만하면서도 안정감이 있는것이다. 파상문 숫막새 기와는 양선으로 만든 것과 막새면에 볼륨을 둔것으로 구분되는데 소박하지만 균형과 유려한 멋을 갖추고 있는 것들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병형토기를 비롯하여 삼족토기, 개물, 등잔 및 벼루 등이 있는데 이들은 백제토기로 정형을 이루는 것들이다. 병형토기는 표면에 자연 유가 있는 평저의 기형인데 광견형으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벼루는 소형의 원판형에 다리가 3개 부착된 것이다.

* 공산성 동쪽의 누각, 공산성 광복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1984.05.17 지정) *
광복루는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는 누각이다. 이 곳은 공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토성이 겹성으로 위치한 곳인데 공산성 두 개의 봉우리 중 서쪽의 봉우리에는 쌍수정이 있고 동쪽의 봉우리에는 광복루가 있으며 공산성의 가장 고지대에 위치하여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현재 광복루로 불리는 건물은 원래 해상루라 하여 성 내의 중군영 中軍營의 문루였으나, 중군영이 폐쇄되면서 중군영지에 있던 것을 일제 초기에 옮겨 웅심각 雄心閣이라 불렀으며, 1945년에 퇴락한 누각을 공주의 주민이 합심하여 다시 보수하였고, 이듬해 4월에 김구, 이시영이 이 곳에 이르러 누각에 국권회복의 뜻을 기념하는 광복이란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누각 명칭이 개칭되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각지붕 초익공 양식으로 창방을 각 칸마다 우미량과 함께 깎아내어 장식적 효과를 내고 있음이 특이하다. 8각의 고준한 화강암 주초 위에 고주를 올렸으며 지붕은 홑처마로써 네 귀퉁이를 반전시킴으로써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 공산성의 서문,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서문지) *
서문은 본래 유지만 남아 있었으나, 최근 문루와 함께 새로운 형태로 문루의 복원이 이루어져 있다. 복원된 문루는 공산성 서쪽 성곽선에 연결되게 성선을 연결하면서 성의 입구를 개구식으로 내면서 그 위에 문루를 올린 상태이다. 더불어 본래의 문지는 성내의 출입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문루는 외형만 겸비하고 출입시설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본래 공산성 서문 문지의 복원은 이미 1975년에 성곽에 대한 보수공사를 겸하여 실시한바 있다. 그러나 1975년의 보수에서는 양단의 기단만 축석하였을 뿐 누적은 복원되지 않은 채 남겨 놓았었다. 당시 복원된 기단부는 높이 4.4m, 너비 5-6m, 그리고 길이는 각각 17m로 조성하였는데 좌우 양단간의 간격은 7m의 범위였다. 본래 서문지의 형태는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 문의 형태에 대하여 여지도지에서는 동,서문은 각각 3칸이란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서문지의 복원은 1990년에 이르러 본래의 문지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3칸 규모의 고주 형태의 문루가 축조되었다. 비록 최근에 새로이 조성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북루

광복루

임류각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

- 홈페이지 : 공주시 문화관광 http://tour.gongju.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에 연접한 옛 지명은 공주읍 송산리 宋山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는 웅진시대(475~538)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원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 이들 무덤은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벽돌무덤[塼築墳]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 돌로 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하였으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웅진시대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활발했던 대외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다.

* 송산리 제1~4호분(宋山里 第1~4號墳)

4기의 백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이미 도굴된 상태에서 공주지역의 백제유적 가운데 1927년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당시에는 5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현재 4기만이 복원되어 있다.무덤에서는 금과 은, 금동으로 만든 껴묻거리가 일부 출토되어 웅진시대(475~538) 백제문화 복원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 무령왕릉(武寧王陵)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501~523)과 왕비의 합장 무덤이다. 1971년 5호분과 6호분 배수로 작업을 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무덤은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塼築墳]으로, 널방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로 쌓았으며 남북길이 4.2m, 동서너비 2.72m, 높이 2.93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燈龕)과 창문시설을 설치하였다. 특히 입구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은 무덤의 주인공과 무덤을 만든 연대를 말해주고 있다. 송산리분군에 있는 무덤 중에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왕과 왕비의 금제 관장식을 비롯하여 총 108종 4,600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다.

* 송산리 6호분(宋山里 6號墳)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塼築墳]으로 널방의 크기는 남북 길이 3.7m, 동서 너비 2.24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는 등감(燈龕)을 설치하였으며,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四神図)를 그렸다. 목관을 올려 놓았던 관받침대가 하나인 것으로 보아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보인다. 벽돌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통해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 송산리 5호분(宋山里 5號墳)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조사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널방은 남북 길이 3.45m, 동서 너비 3.26m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닥에서 1.3m 높이까지는 벽면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쪽부터는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은 후, 정상부에 판석 1매를 얹어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바닥에는 목관을 올려놓는 관받침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굴로 인하여 토기 1점과 약간의 장신구, 그리고 관못만이 남아 있었다.

* 송산리 방단계단형 적석유구(宋山里 方壇階段形 積石遺構)

송산 정상부 가까이에 있는 적석유구이다. 제 1단은 폭이 15m, 제 2단은 11.4m, 제 3단은 6.9m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계단모양을 하고 있다.목관을 놓은 흔적은 없으며, 대신 그 자리에 10cm 두께로 붉은 색의 점토를 깔았다. 내부에서는 삼족토기를 비롯한 백제토기와 옹관편이 수습되었다.내부에서 목관과 같은 매장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성시대 마지막 왕인 개로왕의 가묘(假墓)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무덤이 아닌 제사시설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 홈페이지 : 국립공주박물관 http://gongju.museum.go.kr
* 충청남도의 유물을 보관 전시하는 국립공주박물관 *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에 있는 국립 박물관으로 공주를 비롯한 충청남도 지역에서 출토된 중요 유물을 보관•전시하고, 유적 발굴 조사와 해외 문화재 조사 등을 통한 학술 연구 활동을 수행하며, 지역민을 위한 다양한 문화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평생 학습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대전•충남지역에서 출토된 국보 19점, 보물 3점 등 문화재 10,000여 점을 체계적인 방법으로 보관•관리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학술적 가치가 높은 중요 유물은 상설전시와 특별전시를 통해 관람객과 전문연구자들이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고, 더불어 문화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및 연구를 수행하며 그 결과물을 발간한다. 이 밖에 열린문화공간이자 평생학습의 장으로서 국민들이 수준높은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야외공연장•강당•세미나실 등을 갖추었다.

* 국립공주박물관의 역사 *
일제강점기 공주 지역의 백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공주고적보존회를 모태로 1940년 공주사적현창회(公州史蹟顯彰會)를 결성하여 조선시대 관아 건물인 선화당(宣化堂)에서 박물관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발굴 문화재의 보존과 국민들에게 폭 넓은 문화 체험의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하기 위해 2004년 5월 공주시 웅진동에 박물관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고마나루

고마나루

- 홈페이지 : http://tour.gongju.go.kr
고마나루는 무성한 솔밭 금강 가에 위치하고 있는 옛 강나무 이름이자 공주시의 옛 지명이기도 하다.
공주시 웅진동 북쪽을 휘감아 도는 강나루의 솔밭, 연미산이 마주보이는 강 쪽으로 웅진수신지단이 마련되어 있다.
고마나루 솔밭 강변에 설치된 웅신단은 춘추의 제향뿐 아니라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도 고유제를 지내고 산천의 신령에게 가호를 기원했던 곳이었다.





계룡산도예촌

계룡산도예촌

* 철화분청사기의 맥을 잇는 계룡산도예촌 *

상신리는 마을 중간에 위치한 규모가 큰 당간지주를 통해 이곳이 통일신라에 지어졌던 구룡사지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직도 돌담길이 잘 보존되어 있다. 상신리 주변의 반경 7km 이내에는 도자사에 있어 역사적인 의의를 갖는 일본의 도조 이삼평공의 비가 세워져 있고 조선 초에서 중기까지 오직 이곳에서만 생산된 계룡산 철화분청사기의 생산가마인 사적333호 가마터가 있다. 도예촌 형성은 전승복원을 목적으로 하여 전통과 미래가 공존하는 도자 문화 창출지로서 발전시키기 위해 추진되었다. 1993년 5월부터 입주자가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여 현재 12명의 도예가가 모여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계룡산 도예촌은 자연발생지가 아닌 동시 일괄적으로 입주한 전국 최초의 도예촌이 된 것이다.

계룡산도자예술촌은 5천여평 규모에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한 30대에서 40대 초반의 젊은 도예인 18명이 뜻과 힘을 모아 형성한 공동체 마을이다. 1993년 입촌한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과 도자기 캠프를 운영하면서 점차 계룡산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계룡산 도예촌의 작가들은 지역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철화분청사기의 전승복원에 힘쓰고 있다. 어린이들의 교육산실의 현장으로 자라나는 새싹에게 정신적인 문화와 우리지역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교육 프로그램과 기업체나 단체의 문화활동으로서의 도예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계룡산도예촌은 옛 것을 그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조형개념을 도입하여 개인의 작품 및 교육활동을 하고 있다. 이곳의 주생산품은 항아리, 다기도구일체, 화병, 벽걸이, 물잔, 목걸이, 손도장찍기, 인형만들기, 필통, 촛대, 연적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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