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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힐링 추천 코스

[전북 무주군][힐링 추천 코스] 계곡에서 탁족을 즐기고, 와인 한 잔에 역사를 음미하다

by 어느 개발자의 블로그 202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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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서 탁족을 즐기고, 와인 한 잔에 역사를 음미하다

적상산은 가을이 되면 붉은 치마를 연상하게 하는 붉은 단풍으로 유명한 곳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적상산 사고지와 적상산성, 안국사 등 조선시대의 역사유적과 머루와인을 숙성시키는 머루와인동굴이 자리 잡고 있다. 동엽령으로 이어지는 칠연계곡은 일제강점기 때의 의병유적인 칠연의총과 함께 7개의 소를 이루며 떨어지는 칠연폭포의 장관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 소개 정보
- 코스 총거리 : 49km(칠연계곡 트래킹 3km 포함)
- 코스 총 소요시간 : 6시간


 




칠연의총

칠연의총

- 홈페이지 : http://tour.muju.go.kr
http://www.cha.go.kr
칠연의총은 한 말에 일본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의병장 신명선(申明善)과 그의 부하들이 잠든 곳이다. 시위대 소속 군인이었던 신명선은 순종 융희 원년(1907) 정미칠조약이 체결되어 우리의 군대가 해산 당하자 무주에 들어와 덕유산을 거점으로 의병을 모집, 무주•장수•순창•용담•거창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융희 2년(1908) 4월 신명선은, 계속된 전투로 인해 피로에 지친 부하들과 함께 이곳 칠연계곡 송정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하였다. 이에 마지막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숫적인 열세로 150여 명의 대원과 함께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훗날 부근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신명선과 그의 부하들의 유해를 묻고 칠연의총이라 불렀다. 칠연의총은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넋이 서린 곳이다.





칠연계곡

칠연계곡

- 홈페이지 : http://deogyu.knps.or.kr
안성면 통안마을 뒤 덕유산 쪽에 반석으로 형성된 계곡과 그 일대를 칠연암동이라 하는데, 무주구천동에 비해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기암괴석과 크고 작은 폭포, 소와 담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작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뒤지지 않는다. 이곳의 대표적인 명소는 칠연폭포로 일곱개의 폭포와 못이 연이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폭포는 위에서 아래로 소와 소 사이를 맑은 물이 완만한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칠연암동 하류에 있는 용추폭포는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기암절벽과 노송, 정자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칠연폭포 아래쪽 계곡 건너에는 조선 말기 의병장 신명선과 의병들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여 묻힌 칠연의 총이 있고, 젊은이들이 자연과 더불어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전라북도 자연학습원이 자리하고 있다.





머루와인동굴

- 홈페이지 : 무주머루와인동굴 https://tour.muju.go.kr/cave/index.do
원래 이곳은 무주양수발전소 건설 당시 굴착 작업용 터널로 사용하던 곳이다. 빛을 차단하고, 일정하게 온도가 유지되는 터널은 최고의 와인 숙성 저장고가 되었다. 무주군의 산머루로 와인을 만들고 이곳에서 숙성, 저장, 판매하니 방문자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된다.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와인 족욕이 여행자들에게 인기다.





적상산사고지

적상산사고지

- 홈페이지 : 무주 문화관광 http://tour.muju.go.kr
문화재청 http://www.cha.go.kr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때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한 전국의 사고가 불에 탄 후, 춘추관을 제외한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등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하게 되었으나, 당시 우리나라 북방이 위험하여 광해 6년(1614) 천혜의 요새로 이름난 무주의 적상산에 실록전을 세우고 묘향산의 실록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인조 19년(1641) 선원각을 세워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보관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에 의해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300여 년간 국가의 귀중한 국사를 보존했던 우리나라 5대 사고중 하나였다.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고터는 안타깝게도 적상산 양수발전소댐을 건설하면서 상부댐 안에 수몰되어 안국사와 함께 저수지 윗쪽으로 이전하였다. 적상산은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절벽 주변에 유난히도 빨간 단풍나무가 많아서 가을철이면 마치 온 산이 빨간 치마를 입은 듯 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에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최영 장군이 탐라를 토벌한 후 귀경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산의 형세가 요새로서 적지임을 알고 왕에게 축성을 건의하여, 그 계기로 축성하였다는 적상산성이 있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3년(1227년) 월인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안국사 및 사고를 지키기 위한 호국사찰로서 조선시대 인조 21년(1643년)에 창건한 호국사터가 있다. 현재의 안국사는 이 호국사터에 자리하고 있다.





적상산성 호국시비

- 홈페이지 : http://tour.muju.go.kr
http://tour.jb.go.kr/index.do
* 적상산성과 호국사 내력 알 수 있는 비석

적상산성 내 안국사 경내 남쪽 축대 아래 있는 호국사비(護國寺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는 적상산성과 관계된 기록을 비교적 상세히 담고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현재는 글씨가 마모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고, 1898년(고종 35) 간행된 <적성지(赤城誌)> 고적조(古迹條)에 비문의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1643년(인조 21) 이조판서 겸 대제학인 이식(李植)이 왕명으로 사고를 순찰하고, 정축란 이후 문란해진 사고의 관리와 성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왕에게 진상(秦上)하여 1645년 호국사를 창건하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호국사는 적상산성 안에 있는 사고(史庫)의 수호를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1910년 경술국치로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호국의 도량이었다. 1949년 여순사건 때 소실됐다.

대리석으로 만든 이 비는 이면비(二面碑)로 전체의 높이가 1.78m이다. 장방형 농대석(籠臺石)은 사면에 안상(眼像)을 배치하고 좌우에 운문(雲을紋) 조각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여의두문(如意頭紋)을 조각 돌출시켰고 상두면은 복연(伏蓮)을 새겨 장식했다. 이 농대는 높이27㎝, 정면폭 82㎝, 측면폭 47㎝이다. 농대 위의 비신(碑身)은 상단에 ‘적상산성호국사비(赤裳山城護國寺碑)’라는 두전(頭篆)이 각자되어 있고 그 아래로 본문을 새겼는데 높이는 1m, 폭 59㎝, 두께 17㎝이다. 뒷면에는 ‘순치 2년 10월 일건(順治 二年 十月 日建)’이라 새겼다. 비신 위에 올려놓은 이수(離首)에는 4면에 용틀임을 조형한 반용(蟠龍)을 조각해 놓았다. 이수의 높이는 51㎝, 폭 82㎝, 두께 37㎝이다.





안국사

안국사

- 홈페이지 : ttp://www.templestay.com
적상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찰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화상이 지었다고 전한다. 광해군6년(1614) 적상산성 내에 사각이 설치되고, 인조 19년(1641)에 선운각이 설치되어 적상산 사고로 조선왕조실록과 왕의 족보인 선원록이 봉안되었다. 이때 사고를 방비하기 위하여 호국사를 지었으며, 안국사는 그 전부터 있던 절이었으나, 호국사와 더불어 이 사각을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되어 안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적상산 양수발전소 건설 때문에 이 사찰은 호국사지의 위치로 옮겨져 안국사가 호국사지에 있다.
전각 15여 개로 1995년 이건, 중창되었고 산 정상에 산정호수가 조성되어 있다. 가을철 단풍이 절경이며, 산 정상까지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할 수 있다. 인근에는 무주리조트와 라제통문 구천동 계곡이 있다. 주요문화재는 보물 제1267호 영산회상괘불과, 유형문화재 제42호 극락전, 제85호 호국사비, 사적 제146호 적상산성, 기념물 제88호 사고 등이 있으며, 세계의 불상을 수집하여 모신 성보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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